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조지 월리스]]의 부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_4u-m-IR_uE, width=100%)]}}} || || '''조지 월리스의 CBS 인터뷰''' || 8월 전당대회 이후 부상한 또다른 세력은 [[조지 월리스]]의 [[남부 민주당원]] 세력이었다. 존슨은 텍사스 출신이면서 뉴딜을 계승하였으므로 전통적인 [[뉴딜연합]] 지지층을 기반으로 다층적인 지지 기반을 형성했다. 반면, 존슨의 후계자인 [[휴버트 험프리]]는 강경한 민권파이자 북부 미네소타 주 출신, 거기다 베트남 전쟁 찬성파로 지지 기반이 매우 약했으므로 존슨의 기존 지지층은 험프리[*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을 필두로 한 민주당 당권파와 노동조합 간부들], 매카시-케네디[* 대학생 및 지식인 계층(매카시), 흑인 및 대도시 거주자(케네디)], 월리스[* 남부의 보수적인 농민들과 중서부 노동조합원들]로 쪼개졌다. 매카시가 경선에서 미끄러지고 험프리가 전당대회에서 곤혹을 겪자 이중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조지 월리스]]였다. 조지 월리스는 민주당의 기존 핵심 지지층인 노동조합원과 농민, 중산층 노동자들에게 어필하며 지지율을 급상승시켰다. 조지 월리스의 선거 전략은 그 누구도 과반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1824년의 선거 이후, 양당제 체제인 미국에서는 모든 후보가 과반의 선거인단을 얻어 당선되었으나, 만약 과반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하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다. 이 법에 따르면 한 주는 한 표의 투표권을 가지며 각 주 하원의원의 투표를 통해 어떤 주가 어떤 후보를 지지할지를 결정한다. 월리스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26개 주를, 공화당은 19개 주를 통제하고 있었고 5개 주는 양당의 하원의원 수가 동일해서 누구를 뽑을지 알 수 없었는데 민주당의 26개 주 중 '''13개 주'''가 남부 주였다. 남부에서 민주당은 버지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를 제외한 모든 주를 통제했고 월리스는 이를 통해 험프리를 효과적으로 압박하는 동시에 닉슨이 승리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또한, 중서부 주에서 월리스가 승리할 확률은 낮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중서부 주는 경합주였으므로 일리노이,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등 노동조합원들이 다수 거주하는 중서부 공단 지역에서 충분한 표를 확보하는 것이 월리스의 또다른 전략이었다. 험프리와 닉슨 모두 자신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중서부에 집중하는 동안, 월리스는 손쉽게 남부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어 충분한 선거인단을 쓸어간다는 것이었다. 월리스의 선거전은 68혁명의 혼란 속에 높은 지지를 얻어 1968년 9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닉슨 43%, 험프리 28%, 월리스 21%'''로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조지 월리스의 캠페인은 1968년 9월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쇠락했다. [[커티스 르메이]]를 부통령 후보로 택했던 탓이었다. [[커티스 르메이]]는 "나는 매캐한 숯덩이가 된 일본인을 위해 울지 않습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리겠다" 등의 망언으로 당시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며[* 한국에서는 반일 감정 때문에 인터넷에서 르메이를 고평가하는 흐름이 있지만 미국에서는 대놓고 대 민간인 폭격을 지시하고 이를 정당화했기 때문에 당시에나 지금이나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부통령 같은 높은 지위에 오르는 사람이 전쟁의 학살에 무감각하게 되는 것은 큰 문제로 여겨졌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서는 '''핵무기'''를 쏴서 공산주의자들을 굴복시켜야한다는 극우적인 수사로 대중의 기피를 샀다. 언론은 르메이와 월리스를 '''폭탄 형제들'''이라고 불렀고 대중 사이에서는 월리스가 당선된다면 르메이 부통령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이라는 현실적인 위협이 대두되었다. 결국 월리스의 지지율은 어마어마하게 떨어졌고 본래 우세를 점했던 노스/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주에서 닉슨에 밀린 것은 물론 북부에서의 지지율도 13%에서 8%로 반토막이 났다. 여성 지지층들도 월리스에게서 등을 돌렸고[* 한 여론조사에서, 르메이 부통령 후보 선정 직후 월리스의 남성 유권자 지지율은 20%였으나 여성 지지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월리스의 지지율은 21% 고점을 찍은 후 1968년 10월 경 15%대로 다시 내려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